멀티태스킹: 기회인가? 문제인가?

IL MULTITASKING: OPPORTUNITÀ O DISPERSIONE?1)

조반니 쿠치, S.J.
김기현 베네딕도 S.J. 옮김 (이냐시오 영성연구소)
신문주 베로니카 감수 (서강대학교 대우교수)

  현대 문명의 주요한 특징은, 기회들이 풍부하고, 이 기회들에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장점은 특히 기술의 속도와 능력의 신장에 힘입은 바가 크다. 기술 영역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 하나가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이다.2) 특유의 사고방식과 어떤 이상을 상징적으로 뜻하는 이 용어는 계속 늘어나는 작업, 책무와 관계들을 동시에 수행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이런 놀라운 가능성은 상상할 수 없었다.

  다중 작업의 다양한 기회 제공

  다중 작업의 예는 아주 많다. 이미 우리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었기에 가능한 모든 분야에서 다중 작업을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집안일을 할 때 여러 작업을 동시에 할 수 있는 편리함이 이미 갖춰져 있다. 임무나 연구를 수행하면서도 동시에 쇼핑을 어려움 없이 할 수 있다. 취미로 독서를 하면서도 실시간 제공되는 뉴스를 볼 수 있다. 친구와 얘기한다든가, 공지사항을 보낸다든가, 강의를 수강하고 심지어 학회에 참여하면서도 얼마든지 다른 일을 겸할 수 있다. 이런 다중 작업 수행은 인터넷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다. 

  카카오톡, 라인, 페이스타임 등과 같은 문자 전송 애플리케이션의 싸고 편리한 기능을 보라.3) 이를 통해 전에는 불가능했던 가족, 친구와의 소통 방법을 구현했다. 익명의 사람과 주고받는 소중한 도움이 되는 잠재력에 대해서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4)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은, 원하는 정보를 무진장 향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검색 도구가 제공하는 정보의 바다는 전통수단으로는 불가능하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하고 전 세계 사람들과 메시지를 교환할 수 있다. 복잡해 보이는 작업을 스마트폰으로 즉석에서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은행 업무, 교통 정보와 날씨 예보 확인, 식당, 서점, 영화관 찾기 등을 쉽게 해결할 수 있다.5) 마지막으로, 앞 예들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모든 세부 사항들을 완벽하게 재현한 고대 도시로 가상 현실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명백한 사실이라 언급할 필요조차 없지만, 다중 작업의 예는 무한정 늘어날 수 있다. 서너 가지 분야를 동시에 추진하는 경향이 우리 인간 본성에 있다. 디지털 혁명은 다양한 현실에 접근하도록 허락하며 이러한 측면들을 확장시켰다. 마크 프랜스키(Marc Prensky)가 쓴 논문 제목처럼, 그 결과는 ‘확장된 정신’(mente aumentata)이라는 개념에 이른다.6)

  그러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모든 결과는 ‘패러다임 변화’(cambiamento di paradigma)의 한 측면일 뿐이다. ‘확장된 정신’(mente aumentata)도 손실을 증가시켰다. 이것은 이전의 기술적 발견들이 일으켰던 결과와 매우 유사하다.7) 다중 작업이 구현했던 속도, 유용성과 다양한 작업을 쉽게 수행할 가능성도 어떤 측면에서 ‘손실’(perdite)을 초래한다. 이 사실들을 의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속도와 학습은 양립불가한 이항식

  다중 작업을 적절하게 사용할 때 우리는 각각의 기회를 좀 더 잘 활용하게 된다. 다중 작업이 일을 처리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면 사람들에게 심리적 좌절과 지적 허영으로 인해 실제로 비생산성을 가져온다. 질적 측면에서 보면, 우리의 지성적 능력과 우리가 사물에 접근하는 깊이는 다루는 과제의 가짓수에 정확히 비례하여 질이 떨어진다. 그 자연스러운 결과로, 일상에서 지나치게 많이 활동하는 삶의 경우처럼, 우리는 동시에 많은 일을 하며 제대로 하지 못할 위험을 안게 된다.

  통신기기의 빠른 연결 속도와 엄청난 정보량은 주의력과 집중력을 더욱 방해한다. 그 결과, 생각을 완전히 소화해서 표현하는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의 학습 과정은 두뇌가 갖는 기억 용량과 처리할 수 있는 정보 양 간에 균형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복잡 미묘한 작용이다. 금세기 컴퓨터 과학의 발전과는 달리, 인간 기억의 한계는 실질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화 사회의 엄청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인간의 지성은 오히려 점점 더 위축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 개인의 단기 기억 능력은 잘해봐야 동시에 최대 7개 개념을 기억할 뿐이다. 인간의 정보처리 능력을 컴퓨터 용어로 빗대자면 1초에 126비트가 최대치이다.”8) 그러므로, 몇 가지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작업의 깊이와 효과적인 지구력 유지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바삐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사람과 전화할 때, 그가 말한 내용을 피상적으로 대꾸하고 넘어가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겉으로는 그들이 대화를 따라오지만, 우리가 그들을 ‘잃고 있다는’(perdendo) 느낌이 확연하다. 진정한 경청은 그저 말소리를 알아듣는 일이 아니며, 주의 깊게 듣고, 집중하여 듣고, 깨달으면서 듣는 행위이다.

  비록 특수한 종류이긴 하지만 두뇌도 근육이다. 건강하고 활기차게 유지하려면 어렵고 힘든 과제나 활동에 도전함으로써 단련해야 한다. 건성으로, 즉흥적으로 하는 활동은 두뇌를 게으르고, 둔하게 만들어 현상 유지도 할 수 없게 퇴화시킨다. 온종일 웹 서핑을 하고 난 후 내가 오늘 뭘 했나 돌이켜 보라. 몇 개의 기억이 인상 깊게 떠오르지 않고 모호하게 뒤범벅된 자신을 보게 된다. 이 현상이 바로 두뇌가 퇴화하는 증상이다. “‘디지털 제국주의자들’(I colonialisti del digitale)은 디지털 원주민이 이미 다중 작업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우리 두뇌는 의식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한 번에 한 가지만 할 수 있다. 빈번하게 과제를 이것에서 저것으로 옮기면 지적 생산성을 떨어뜨릴 뿐이다.”9)

  사실, 소위 다중 작업가들은 앞에서 언급한 기억하고 집중하는 능력과 머리를 비우고 쉬는 시간이 부족하여 한 활동에서 다른 활동으로 이동하는 데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이것이 그들의 주특기여야 할 텐데 말이다.10)

  다중 작업에 의한 사회적, 교육적 손실

  인터넷에 관한 편견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작가 두 사람이 존 폴프레이 (John Palfrey)와 얼스 개서 (Urs Gasser)이다. 두 작가는 자신의 연구에서 현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포화 상태가 될 위험이 훨씬 많은 이유로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1) 신기술의 특징인 현기증 날 정도로 빠르고 많은 전파 속도와 전파수단, 2) 동시에 접속할 수 있는 인원의 증가, 3) 수행할 작업이 갖는 복잡도의 증가와 그 작업을 완결하는 속도의 증가. 4) 많은 양의 정보와 그 처리에 필요한 시간으로 인해 수용한 정보에 대한 가치 확립의 어려움, 5) 자신들이 다루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기에 부족한 젊은이들과 다른 이들이 지닌 능력과 경험이다.11)

  그뿐만 아니라, 이 점에 대해 수집한 개인 증언들은 일반적인 분산 경향을 보이는데, 그것이 결국 한 개인의 하루 일상에서 유일한 ‘고정적인’(stabile) 측면이 된다.12)

  -나는 인터넷을 할 때마다 다중 작업을 즐긴다. 지금, 이 순간 TV를 보는 중에도 몇 분마다 이메일 체크를 하고, 뉴스도 읽고, 음악을 콤팩트 디스크(CD)에 내려받고, 이 메시지도 쓴다. (17세 청소년)

  -나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심심하다. 왜냐하면 멈추는 시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웹 페이지가 열리기를 기다리거나 TV 광고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17세 청소년)

  – 나는 대개 학교를 파하기 전에 숙제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내 무릎에 책을 놓고, 컴퓨터를 켜는 동안, 수학 숙제를 하거나 작문을 한다. 내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다른 일을 한다. 따라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14세 소년)

  – 교과서는 가방에 묻어둔 채 있지만, 노트북 컴퓨터는 언제나 책상 위에 켜져 있다. 모니터 화면에는 역사, 영어나 물리학 문서를 띄어 놓고, 뒤에 내 페이스북이나 아이튠즈를 띄어놓는다. 한편 헤드폰을 쓰고 팟캐스트를 듣고 때로는, 더 집중해서, 유튜브에서 비디오를 본다. (15세 된 딸을 둔 엄마)

  더욱이, 젊은이들의 인간관계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만 국한되면 그들은 진정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없다. 터클(S. Turkle)이 ‘함께 그러나 혼자’(Insieme ma soli)라고 부른 현상이 더욱 널리 퍼지고 있다.13) 아동기와 초기 청소년기에 인터넷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 젊은이들은 방에서 나오지 않고, 운동 경기, 인간관계 맺기, 야외 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체의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위험을 무릅쓰거나’(osare)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미국에서 실시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요즘 어린이들이 야외에서 뛰노는 시간이 하루에 15~25분에 불과하며, 계속 감소 추세에 있다. 1인당 국립공원 방문 횟수는 1988년 이래로 20% 감소하였고, 자연에서 여가와 취미를 즐기는 활동은 1981년 이래로 18~25% 감소하였다. 동시에, 미취학 아동의 80%는 이미 컴퓨터를 사용하며, 8~18세 연령은 하루에 7시간 반 이상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미디어 기기(TV, 핸드폰, 컴퓨터)를 사용한다. 연구 결과는 우리가 자연환경을 접하고 시간을 보낸다면 두뇌 발달에 더 유익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중 작업을 지향하는 경향은 학교와 직장 환경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전 세대에 걸쳐 확장되고 있다. 약 2조원 어치 애플(Apple)사 주식을 갖는 주요 주주인 자나 파트너스(Jana Partners LLC), 캘리포니아주 교사 퇴직연금(California State Teachers’ Retirement System) 두 기관이 2018년 1월 6일 애플사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미디어와 아동 건강 센터와 앨버타 대학교가 2,300명의 중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보고하였다.

  – 디지털 기술을 교실에 도입하고 3~5년이 지나면서, 대다수(67%) 교사들은 많은 학생들(75%)의 성공적인 과제 수행 능력이 점점 더 떨어지는 것을 걱정했다.

  – 90%의 교사들은 많은 창을 열어 놓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사용하는 학생들(86%)에게 감정 조절이 점점 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와 관련하여, 트웬지(J. M. Twenge)의 글도 인용했다. 하루 평균 3시간 전자 기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하루 1시간 사용하는 사람보다 우울증, 자살 위험이 35% 높아진다. 하루 평균 5시간을 사용한다면 그 위험도는 71%로 높아진다.15)

  – 다중 작업을 도입한 지 3~5년이 지나자 부정적 영향이 불거졌고, 여가와 식사 같은 기본적인 활동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 상황은 한 중학교 교사의 말에 잘 요약되어 있다. “예전에는 점심시간이 되면 학생들이 밖으로 뛰쳐나가 활동하고 어울려 놀았다. 지금은 많은 학생들이 휴식 시간에 책상에 앉아 전자기기를 가지고 논다.” 게다가, 불면증, 비만, 척추측만증, 당뇨 등 심각한 건강 장애가 생긴다.16)

  결정 장애

  선택해달라는 상품이 많으면 많을수록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역으로 점점 더 줄어든다. 식품 매장에서 제품 판매에 대한 윌슨 & 스쿨러(Wilson and Schooler)의 조사에 따르면, 6종류의 잼을 계산대 옆에 진열해 놓으면 멈춰 선 소비자의 30%가 최소한 한 개 이상을 구매했다. 그런데, 4배 많은 24종류의 잼을 진열해 놓으면 멈춰 선 소비자의 3%만 구매했다.17)

  이런 현상은 인생에 중요한 선택 순간에도 나타난다. 실현이 가능한 선택지들이 가득한 시장에서, 역설적이게도 결정 능력이 피해를 본다. 다양하고 상이한 제안들을 잠깐 맛보거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유목민’(nomadica)처럼 방랑하는 신세가 된다. 이런 식으로, 선택지 앞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선택지는 휴지 조각이 되어버린다.

  무엇보다도 이탈리아는 ‘니트’(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로 불리는, 교육, 고용 또는 직업 훈련 과정 중에 있지 않은, 곧 공부하거나 일하거나 구직 활동을 하고 있지 않은 젊은이들이 230만 명(2016년)이라는 애석한 유럽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경제 위기에 따른 고용 시장 불안과 함께 이런 상황 저변에는 청년들이 시작한 노력이 있지만, 그들은 진정한 확신이나 온전히 헌신하려는 마음 없이 다른 일들을 병행하면서 학업을 중단하거나 마치게 된다. 그 최종 결과가 “실패와 중단, 낮은 수준의 자존감과 가족에 대한 지나친 의존성을 보이는 험난한 교육 과정”인데, 가족들은 기운을 북돋아 주기도 하지만 구속하기도 한다.18)

  이런 교육 문제로 인하여, 위에 언급한 젊은이들 중 성취하려고 시작했던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이의 비율이 높다. 이런 젊은이들의 취약점은 스포츠 같은 여가 활동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광범위한 디지털 유목민에는 여러 종족이 있다. 헬스 매니아도 있고, 축구광도 있고, 클럽에서 운동하면서 챔피언을 꿈꾸는 사람도 있고, 열렬한 응원단도 있다. ‘니트’(NEET)는 어떻게 용돈을 해결할 것 같은가? 부모에게 손 벌린다. 강좌, 활동, 시합 등의 비용을 대기 위해 ‘니트’(NEET)들은 성인이 되어도 여전히 부모에게 용돈을 받는다. (페이스북 시대인 요즘도 여전히 용돈이라는 용어가 있다.) 경제적으로 의존하면서 부모 품에서 양육되던 청소년기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19)

  다중 작업과 종교계

  다중 작업의 정신은 오직 이 길밖에 없다는 소명의식과 상충한다. 이 길을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선택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으며, 따라서 미래 설계에 어려움을 겪는다.

  16~29세 청년 약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자기에게 맞는 천직이 뭔지 찾지 못하겠다는 호소가 광범위하게 퍼져 가고 있음이 나타났다. 이 현상은 앞에 ‘니트’(NEET) 사례에서도 이미 드러났었다.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가장 주된 원인은(76%), “인생에 항상 여러 가지 기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20)라는 믿음이었다.

  이 연구에 참여한 응답자들은 모든 것을 접고 험난한 소명의 길을 가는 용기를 높이 평가했다. 특히, 응답자의 65%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는 소명, 70%는 선교 지역으로 떠나 복음을 실천하는 소명을 높이 평가하는 응답을 했다. 그러나, 높이 평가한 사람의 57%는 다음과 같은 응답도 추가했다. 그런 소명이 굳이 종교적 선택으로 국한될 필요는 없으며 그런 소명을 가는 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모든 길은 결국 같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구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그러므로, 응답한 젊은이들 눈에 온전히 종교적 소명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인생의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다른 기회들을 모두 포기하는 일은 막대한 피해로 인식될 뿐만 아니라, 그런 소명은 비단 종교적 실천 이외 다양한 방법과 사회적 대안으로도 얼마든지 달성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21)

  다시 한번 말하자면, 자체로 가치 있고 추구할만한 일을 선택하여 그 결과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사용하여 삶에 만족과 의미를 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다양성이 제시하는 가능한 선택지들은 기회라기보다는 걸림돌이 될 위험이 있다. “자신에게 맞는 천직을 찾는 일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는 불편함에 비견된다.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길이 있을 때, 개인은 자신을 많은 선택지에서 구해내서 결정을 내리는 방법을 모른다.”22)

  20년 전쯤에 유럽 주교들이 작성했던 문서에서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여러 개의 게임 테이블을 놓고 동시에 즐기는 인생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다룬 적이 있다. 이 시의적절한 문서는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자신에게 맞는 성소를 선택하거나 보다 일반적으로 자기 인생을 설계하는 능력을 약화시키는 심각한 장애 중 하나임을 정확히 밝혔다. 그 주교들은 성소라는 주제를 무엇보다도 먼저 지성의 문제로 보았다. 그 까닭은 지성은 가능한 경험들을 다른 저울대 위에 놓음으로써 경험들을 인식하고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는 것은 중대한 지적 결함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내면을 읽고, 필수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을 구별하는 지적 능력이 빈약함을 나타낸다. 유럽의 주교들이 보기에 이 결함은 실현 가능한 삶의 방식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 문화가 지고한 가치의 가능성을 더 이상 정의하지 않거나 인생에 의미를 주는 특정한 가치를 모으는 데 실패한다면, 모든 것은 같은 수준에 놓이고, 모든 가능한 선택지는 추락하고 구별할 수 없게 되어 일차원적이 된다. … 지적이고 재능 있는 젊은이가 무언가를 믿고 살려는 열정을 지니고 더 큰 목표를 향해 분투하거나, 자신의 노력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희망이 사라져버린 모습을 보면 매우 슬프다. … 성소가 없다면 미래 또한 없다. 미래는 기껏해야 현재의 복사판일 것이다.”23)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부차적인 가치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지적 결함은 젊은이가 기준점을 잃게 만들고 청년 문화를 일종의 무정부 상태에 이르게 한다. 이 모든 것은 위태롭게 흔드는 불안감을 자아내는 데 이것을 겪는 것이 안정감, 의미, ‘질서에 대한 믿음’(una fede nell’ordine)24)을 경험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성장 단계에서 영구화되면 그 사람은 연장된 청소년기에 머물게 된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인생의 모험에 참여해 보지도 못한 채 꿈을 거부당하고 임시방편들에 만족하게 된다.

  ‘성찰’: ‘다중 작업’ 길들이기

  이런 문제들이 있다고 해서 다중 작업 무용론을 들고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잘 쓰면 다중 작업은 유익하고 잠재력이 풍부하다. 실제로, 대인 관계, 정보 탐색, 활동들과 지금 있는 장소에서 다중 작업을 채택하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한다는 사실은 그럴만한 매력이 있음을 반증한다. 다중 작업은 매력이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사고방식과 우리가 삶의 구조를 체계화하는 방법에서 그야말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 또한 이 주제에 대한 진실은 복잡하고 매혹적인 다중 작업을 사용할 때 생기는 긍정적 가치와 부정적 가치를 인식하고 서로에게 올바르게 적용할 수 있는 개선 수단을 찾아냄으로써 어딘가 중간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 이점은 평준화도 타협안도 아닌, 고대인들이 덕으로 여겼던 양극단 사이의 균형에서 발견된다.

  여러 가지 실행 가능한 해법 중에, 이 주제의 복잡성을 고려한다면, 이상적인 균형을 이루기 위해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제안이 있다. 로저 실버스톤(Roger Silverstone)은 새로운 발견이 우리에게 봉사하고 그 반대가 되지 않으려면 이러한 발견을 ‘길들일’(addomesticare)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계획-개발-분배-사용에서 의미를 찾고 통제하기 위한 투쟁이 따르기 때문이다. … 미디어는 우리를 연결하는 동시에 사이를 벌리며, 참여시키는 동시에 배제하고, 표현의 자유를 주면서 감시와 통제할 권리를 주장하고, 허용하지만 방해하고, 오래된 불평등을 제거하려고 애쓰는 만큼 새로운 불평등을 만들어 낸다.”25)

  각각의 새로운 상황에서 득실(得失)은 발생한다. 이 득실에 대한 엄정한 설명이 또한 다중 작업의 주제에 필수 요소이다. 우리는 지금 자각(自覺)을 얘기하고 있다. 전통적 용어로는 자각(自覺)이지만, 현대적 용어로는 성찰(省察)이 다중 작업의 주제와 관련해서 유행하고 있다. 성찰은 다중 작업의 환경이 조성될 때 다음과 같은 고전적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자기 생각과 감정을 수용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는 과연 이것을 원하는가? 만약 원치 않는다면(또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다면), 나는 중독에 가까운 전자동 상태가 되어 버린 내 생각, 감정, 결정들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할 수 있는가?

  “깨어있는 자각이란 실제로 자각하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음의 여러 움직임들을 살펴보는 일이다. 자동적이고 의식하지 않는 피상적인 삶 대신에, 깨어있는 삶은 마음을 성찰하여 우리가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의식하게 하는데, 이것 때문에 마음이 변화할 수 있게 된다.”26)

  자각하는 능력은 멈추는 능력을 의미하며 연습과 훈련의 결과이지, 결코 자발적 또는 자동적으로 되지 않는다. 자각의 반대의 예가 중독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자각은 노력, 실버스톤이 말했던 ‘분투’(lotta)를 요구한다.

  디지털 세상에 대해 잘 아는 작가 하워드 라인골드(Howard Rheingold)는 수업 시작 때, 학생들에게 경청하는 훈련을 하라고, 또한, 어떤 기기를 다룰 때 천천히, 침착하게, 의식적으로 그 기기를 켜고 끄겠다는 결심을 하라고 역설했다. “나는 학생들이 전혀 관심이 없었던 영역에 최소한의 관심을 유도하기가 매우 위태로운 처신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학생들에게 수업 중 그들의 노트북 컴퓨터 사용을 의식하기 시작하라는 요구는 그들에게 보라색 공룡27)을 생각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28)

  몸에 대한 관심 

  성찰 수련은 해로운 몸의 자세를 고쳐 호흡, 자기 인식 등 평소 신경 쓰지 않았던 기초적인 활동을 증강시켜준다. 자동화에 중독되어 본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린다 스톤 (Linda Stone)은 이메일을 열 때마다 내용과 무관하게 호흡을 멈춘다. “호흡은 주의력을 조절한다. … 규칙적인 리듬의 호흡은 긴장을 풀어주고, ‘쉼과 소화’(riposa e digerisci) 상태의 상징인 소화 효소와 포만감을 내놓는다.”29)

  반면, 호흡을 멈추고 있으면 긴장을 지속시켜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호흡에 대한 관심은 지금 여기로 자율권을 되찾아 오는 길이다. 호흡 중시가 자동화와 성찰 수련이 근본적으로 만나는 지점이다. “호흡은 또한 의도적인 것이다. … 우리는 자동성과 의도성, 몸과 정신 사이의 경계에 와 있다.”30)

  성찰 수련과 함께 또 하나의 필수적 수련은 멈추고 휴식할 줄 아는 것이다. 짧은 시간만이라도 멈추어 휴식을 가지면 자동화 기계 같은 나쁜 습관을 예방한다. 휴식 시간을 표시한 시간표를 잘 보이는 곳에 두거나, 알람을 예약해 둔다면 일도 더 잘할 수 있고 집중력도 더 나아질 수 있다.

  휴식 시간에 밖에서 산책한다면 창의력도 더 높아지고 생산성도 더 오른다. “중간마다 갖는 적당한 휴식이 더 긴 시간 동안 고도로 집중력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관심의 부족에서 집중력이 떨어진다고 여기는 생각은 잘못이다. 생각을 통제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통제력을 유지하는 일은 의외로 쉽다.”31)

  특히 한창기에 있는 젊은이에게 몸을 움직이는 활동은 낭비가 아니다. 오히려 생산성을 높이는 필수 요소이다. 건강한 휴식은 피곤을 풀어주고 마음에 여러 잡념을 해소해 주며 새 정신과 자유를 얻게 해 준다. 성찰 수련은 정신적 문제의 원인이 되는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가장 만연한 오해는 유익한 휴식, 여가 활동이 시간 낭비라는 그릇된 믿음이다. 그러나, 경험적 사실은 휴식이 창의성을 촉진하고, 지금 작업하고 있는 일에 똑똑히 집중하게 하고 더욱 진지하게 임하게 한다. 온종일 인터넷 세상을 끊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 사이트, 저 사이트로 옮겨 다니면 쉬지 못하고 계속 강제 노역에 끌려다니는 거나 다름없다. 이 지경은 잘못일 뿐만 아니라 위험한 환각 상태이다. 이런 휴식 시간은 쉼이 없고 단지 정신을 더 괴롭힐 뿐이다.

  영적 생활의 영원한 타당성

  성찰하는 태도는 익숙한 영적 전통의 진리를 생각나게 한다. ‘여기에 현존하기’(essere presenti al presente)로 이해되는 자각이다. 자각 능력은 다름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무엇이 좋은 지를 인식하는 능력이다. 이는 곧 심리적으로 복음의 덕목인 ‘깨어 있음’(la vigilanza)과 유사하다. 깨어 있음은 생각, 시선과 말의 ‘지킴이’(la custodia)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일관성 있는 행동을 하도록 인도한다.

  이 주제는 매우 광범위하고 복잡하므로 여기서 나는 이 글에 적합한 내용을 간단히 언급하려 한다. 『영신수련』 [258]항에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자신의 진실과 하느님의 신비에 접촉하는 길로 호흡과 심장 박동에 관심을 두는 기도 방법(‘세 번째 기도 방법’)을 소개한다. 이렇게 호흡을 이용한 명상법은 신경 과학에서도 연구되었다. 이 명상법을 하는 동안 뇌는 개인의 의식과 행동, 주변 환경과 뇌 활동에 연관된 알파파를 발사한다.32)

  이 주제에 대한 학제 간 협업 연구는 또 하나의 속설이 틀렸음을 입증한다. 기도는 시간 낭비라든가, 또는 문제 회피라는 생각은 틀렸다. 우리가 깨어 있음이라고 이해한, 자각과 영성은 오히려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멈추고 서로에게 귀 기울이길 배우는 사람, 절대자 앞에 고요하게 머무는 사람은 지적, 인간 관계적, 전문적 관점에서도 존재의 깊은 차원과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만난다.33)

  ‘여기에 현존하기’ 개념은 고대 양심 성찰 수행과 닮은 점이 많다. 고대 양심 성찰 수행법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에 일어났던 일들을 되돌아본다.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행하는 이 양심 성찰은 나쁜 습관을 없애고, 바람직한 인격적 변화를 이룩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34)

또한, 인생에 근본적 결정을 내리는 문제에 있어서 언제가 가장 적기인지 식별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성경에 사도들의 생애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은 사도들이 다양한 다른 활동을 하는 중에 일어났다는 점이 놀랍다. 예를 들어, 마르코 복음 1,16-20 (열왕기 상권 19,19-21을 연상시킨다.)의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은 “가서, 보고, 말을 건네고, 듣고, 오고 등 인간 삶의 모든 기초적 활동 중에 부르심이 일어난다. … 부르심은 그들의 일상생활 중에 일어나고 단독이 아니라 여러 명에게 함께 일어난다.”35)

  만약 누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마음을 갖췄다면, 그가 다중 작업에 종사한다는 사실은 하느님께 장애물이 아니다. 마태오 복음 13,44-46의 비유에서 말한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기쁨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던 일들을 가능하게 한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세속적인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생명의 주님을 따르는 기본 조건이다.

  이 중요한 점을 깨닫도록 돕기 위하여,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2]항에 이런 가르침을 적었다. “우리 영혼을 가득 채우고 만족시키는 것은 많은 것을 아는 데 있지 않고 어떤 것을 내적으로 느끼고 맛 들이는 데에 있다.” 다중 작업의 부작용을 해결하고, 신기술이 새로이 열어주는 기회들을 최대한 선용하기 위해서는, 사려 깊음, 침묵, 의욕의 가치관을 재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36)

이런 덕목들은 우리가 자신을 알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드높이며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데 필수 조건들이다.


1) La Civiltà Cattolica, 4029 (5/19 maggio 2018), 242-256.
2) 편집자 주. 본문에서 ‘다중 작업’(多重 作業)으로 번역한다.
3) 편집자 주. 원문에서는 ‘WhatsApp, Facetime, Viber’를 예로 들었다. 한국에서 자주 사용하는 문자 전송 애플리케이션으로 바꿨다.
4) 참조: Giovanni Cucci, Altruismo e gratuità. I due polmoni della vita, (Assisi: Cittadella, 2015), 130-134.
5) 참조: Samantha Murphy, “E-filing becomes the new normal,” Tech News Daily, (2011. 3. 26).
6) “오늘날 인간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최근 기술의 도움을 받아 전에 했던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더 빨리 생각하고, 더 잘 계획하며, 더 깊이 분석하고, 더욱 복잡한 문제를 풀며, 심지어 자신의 몸도 더 잘 알게 됐다.” Marc Prensky, La mente aumentata: Dai nativi digitali alla saggezza digitale, (Trento: Erickson, 2013), 19.
7) 참조: Giovanni Cucci, Paradiso virtuale o infer.net? Rischi e opportunità della rivoluzione digitale, (Milan: Àncora-La Civiltà Cattolica, 2015), 16-24.
8) John Palfrey-Urs Gasser, Nati con la rete. La prima generazione cresciuta su Internet. Istruzioni per l’uso, (Milan: Rizzoli, 2009), 257. 참조: George. A. Miller, “The Magical Number Seven, Plus or Minus Two: Some Limits on Our Capacity for Processing Information”, The Psychological Review, 63 (1956), 81-97.
9) Roberto Zanini, “‘Tablet a scuola? Andateci piano’ Intervista a Roberto Casati”, Avvenire, (2013. 6. 14).
10) 참조: Eyal Ophir-Clifford Nass-Anthony Wagner, “Cognitive Control in Media Multitaskers,” PNAS, 37 (2009), 15583-15587.
11) 참조: PalfreyGasser, Nati con la rete, 266.
12) 참조: Manfred Spitzer, Demenza digitale. Come la nuova tecnologia ci rende stupidi, (Milan: Corbaccio, 2013), 195; 참조: Victoria Rideout-Elizabeth Hamel, “The Media Family: Electronic Media in the Lives of Infants, Toddlers, Preschoolers and Their Parents”, (Menlo Park: Kaiser Family Foundation, 2006). https://kaiserfamilyfoundation.files.wordpress.com/2013/01/7500.pdf
13) 참조: Manfred Spitzer, Demenza digitale. Come la nuova tecnologia ci rende stupidi, (Milan: Corbaccio, 2013), 195; 참조: Victoria Rideout-Elizabeth Hamel, “The Media Family: Electronic Media in the Lives of Infants, Toddlers, Preschoolers and Their Parents”, (Menlo Park: Kaiser Family Foundation, 2006). https://kaiserfamilyfoundation.files.wordpress.com/2013/01/7500.pdf
14) Ruth Atchley-David Strayer-Paul Atchley, “Creativity in the Wild: Improving Creative Reasoning through Immersion in Natural Settings,” Plos One, 7(2012); F. T. Juster-F. P. Stafford-H. Ono, Changing Times of American Youth: 1981–2003, (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2004), www.ns.umich.edu/Releases/2004/Nov04/teen_time_report.pdf
15) Jean M. Twenge, iGen: Why Today’s Super-Connected Kids Are Growing Up Less Rebellious, More Tolerant, Less Happy and Completely Unprepared for Adulthood and What That Means for the Rest of Us, (New York, Atria Books, 2017); “Open Letter from Jana Partners and Calstrs To Apple Inc.”, https://thinkdifferentlyaboutkids.com/index.php?acc=1.
16) 참조: “Growing Up Digital Alberta”, https://thinkdifferentlyaboutkids.com/ index.php?acc=1/,2016.
17) 참조: T. Wilson-J. Schooler, “Thinking too much: introspection can reduce the quality of preferences and decision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60 (1991), 181-192.
18) 참조: Anna Ancora, “Nel girone dei Neet”, in Una generazione in panchina. Da Neet a risorsa per il paese, eds., Sara Alfieri-Emiliano Sironi, (Milan: Vita e Pensiero, 2017), 170.
19) Dario Di Vico, “Quelli che per le statistiche non lavorano e non studiano,” Corriere della Sera, (2016. 7. 10).
20) Luigi Berzano-Carlo Genova, “Vocazioni tra rinuncia e autorealizzazione”, Rivista di Scienze dell’Educazione, 45 (2007, 1/2) 50; 참조: Stefano Palmisano, “Dio chiama: Chi risponde? Riflessioni sulla vocazione religiosa,” in Chiamati a scegliere, Cinisello Balsamo, ed., Franco Garelli, (MI: San Paolo, 2006), 83-103.
21) Ibid., 51.
22) Ibid., 41.
23) Pontificia Opera per le Vocazioni Ecclesiastiche, Nuove vocazioni per una nuova Europa, (Città del Vaticano: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98), no. 11.
24) Peter Berger, Il brusio degli angeli, (Bologna: il Mulino, 1969), 92.
25) Roger Silverstone, Perché studiare i media?, (Bologna: il Mulino, 2002), 226. 참조: Giovanni Cucci, Internet e cultura, (Milano, Àncora: La Civiltà Cattolica, 2016).
26) Daniel Siegel, Mindfulness e cervello, (Milano, Cortina, 2009), 13.
27) 편집자 주: 그들이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캐릭터.
28) Howard Rheingold, Perché la rete ci rende intelligenti, (Milano, Cortina, 2013), 54.
29) Linda Stone, “Just breathe: Building the case for Email Apnea”, Huffington Post, (2008. 2. 8).
30) Siegel, Mindfulness e cervello, 169; 참조: David Rock, Your Brain at Work: Strategies for Overcoming Distraction, Regaining Focus, and Working Smarter All Day Long, (New York: Harper Business, 2009).
31) Atsunori Ariga-Alejandro Lleras, “Brief and rare mental ‘breaks’ keep you focused: deactivation and reactivation of task goals preempt vigilance decrements”, Cognition, 118 (2011), 443.
32) 참조: Gary Wolf, “What it is, is up to us”, Reed Magazine, (2002,2), 10-13; Les Fehmi-Jim Robbins, The Open-Focus Brain: Harnessing the Power of Attention to Heal Mind and Body, (New York: Trumpeter, 2007).
33) 참조: O. Pergams – P. Zaradic, “Evidence for a fundamental and pervasive shift away from nature-based recreation”, Proceedings of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05 (2008), 2295–2300.
34) 참조: Giovanni Cucci, “Conoscenza di sé e conoscenza di Dio”, La Civiltà Cattolica, 3861 (7 maggio 2011), 282-288.35) Joachim Gnilka, Marco, (Assisi: Cittadella, 1987), 85f.
36) 참조: Giovanni Cucci, “Il desiderio, motore della vita”, La Civiltà Cattolica, 3834 (20 marzo 2010), 568-578.